"내가 아니면 안 된다" 정조의 지독한 천재성이 초래한 시스템의 붕괴
영웅의 죽음 뒤에 찾아온 기묘한 침묵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조선 조정은 기묘할 정도로 조용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이나 노론의 폭정이 곧바로 시작될 것이라는 대중적 예상과 달리, 권력의 무게중심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한 가문으로 쏠렸습니다. 바로 조선 말기를 통째로 암흑 속에 밀어 넣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시작입니다. 흔히 역사에서는 이를 정조의 개혁이 실패하고 간신들이 나라를 훔친 사건으로 묘사하곤 합니다. 하지만 진짜 비극은 이 파멸의 시나리오를 설계한 주역이 다른 누구도 아닌 정조 자신이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세도정치의 서막을 연 인물, 정조가 직접 키웠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 김조순(金祖淳). 그는 정조의 개혁을 무너뜨린 희대의 간신으로 기억되기 십상이지만, 사실 정조가 생전에 가장 아끼고 신임했던 핵심 측근이었습니다. 정조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자신의 어린 아들(순조)을 지켜줄 장인으로 김조순을 직접 낙점했습니다. 심지어 침전에 그를 불러 "내가 죽은 뒤에도 아이를 잘 보살펴달라"며 눈물로 탁고(託孤, 왕이 죽으면서 자식을 신하에게 부탁함)를 올리기까지 했습니다. 정조는 김조순의 가문이 명망 높은 노론 명문가이면서도 비교적 색채가 옅고 온건하다는 점을 높이 샀습니다. 자신이 죽은 뒤 붕당 간의 뼈를 깎는 싸움에서 아들을 지켜줄 가장 안전한 '방패'라고 확신했던 겁니다. 시스템을 믿지 않은 천재의 딜레마 왜 조선 최고의 천재 군주는 이런 치명적인 오판을 했을까요? 답은 정조 특유의 '1인 정치 스타일'에 있습니다. 정조는 지독하리만치 똑똑한 군주였습니다. 그는 신하들을 신뢰하여 권력을 나누기보다, 자신이 모든 학문과 정치를 압도하며 통제하는 방식을 선호했습니다. 밤마다 비밀 편지를 보내 조정을 조종했던 밀실 정치 역시 정조라는 초인적인 인물이 있었기에 작동 가능한 시스템이었습니다. 문제는 그가 '정조가 없는 조선'의 시스템을 구축하지 ...